[외부칼럼] 공산권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1)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일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1):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지난 3월 26일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의 천안함 폭침 원인을 조사해 온 민군합동 조사단은 5월 20일 조사결과 발표에서 침몰 해역에서 수거한 어뢰의 프로펠러와 추진축 등 부품이 북한산 CHT-02D 어뢰의 설계도면과 일치함을 밝혔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측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스모킹 건: smoking gun)’들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날조극’이며 남북한 관계를 파탄시키려는 모략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물증을 확인하기 위한 검열단을 남한 현지에 파견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북한이 60년 전 대남 평화공세를 취하다가 6월 25일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뚫고 남침을 하고서도 지금까지 북침을 하였다고 선전을 하고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 그간 자행해온 각종 도발과 테러를 부인해 온 것보다 더 질이 나쁘고 뻔뻔하다. 마치 살인을 부인하던 범인이 현장 검증까지 스스로 하겠다는 식으로 막가는 태도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입성하기까지 단 3일이 걸렸다. 북한군은 당일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26일 의정부, 27일 창동,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김포· 문산· 포천·의정부·춘천·가평 등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력에서 남북한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상군 병력은 국군의 2배였다.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18만2000명이었다. 국군은 8개 보병사단과 2개 독립연대 등 9만4000명이었다. 북한 전투장비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개전 당시 북한은 200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했다. 국군은 단 한대도 없었다. 장병들은 북한 전차 소리만 들어도 도망을 가거나 두려움에 떨었다. 공군력의 경우 북한은 전투기 포함 211대가 있었지만,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북한 주공(主攻)은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았다.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는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제1사단과 1개 전차연대는 문산-서울 방향으로 공격했다. 나머지 6사단은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로 진격하게 했다.
조공(助攻)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맡았다. 이 중 제2, 12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는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 동측을 우회 공격, 국군 주력을 포위하도록 했다. 나머지 제5사단은 제766유격연대와 제945육전대의 지원을 받아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국군의 전방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을 배치했다. 그나마 북한 남침 전날인 24일 0시를 기해 한동안 계속했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됨에 따라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1)
위와 같은 전쟁 초기의 전황과 이를 맞이한 한국 측의 대응, 특히 많은 장병의 휴가와 외박에 비추어 6·25 전쟁이 어느 측의 공격에서 시작되었음이 자명한데도 한국 국내에서는 북한의 북침 주장이 위험할 정도로 퍼져 있다.
이와 같은 북침 주장과 관련하여 지난 10년간 좌파정부 집권동안 주적 개념에 대하여도 김충배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2004년 1월 육사 가(假)입교생 의식조사”를 한 결과 당시 250여명의 가입교생 중 무려 34%가 주적(主敵)이 ‘미국’이라고 답했고, ‘북한’이라고 답한 입교생이 33%에 머물 정도였다고 증언한 것처럼 크게 오도된 바 있다.
이렇게 학생들의 주적 개념이 오도되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2008년 6월 23일 행정안전부가 “리서치&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중·고생 1,0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보·안전의식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를 묻는 질문에 미국(28.4%)이 가장 높았으며, 다음이 일본(27.7%)이고, 북한은 24.5%로 3위에 그쳐 충격을 주고 있다.
북한은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남북한 군인, 유엔군과 중공군의 군인이 300만 명에 달하고 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야만적인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키고도 북침 주장을 계속하고 있고 한국 내부에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북침 주장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을 구상하고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위장전술임이 북한 자료 분석을 통하여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2)
특히 1992년부터 러시아가 더 이상의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결정적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전후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Stalin)-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 간에 오고 간 비밀전문들을 공개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론자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워졌고(3) 남침, 북침에 대한 논쟁도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남아 있는 문제는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의 회고록(4),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과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역임한 이상조의 1989년 9월 11일 기자회견 등에서 강조된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전쟁”인가를 검증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는가를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5)로 검증해보고 휴전 57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얻을 교훈과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계속)
<필자 주>
* 발표문은 『국제정치논총』 제39집 2호(1999)에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관한 연구” 제하로 개재된 연구자의 논문 중 누구에 의하여 남침 전쟁이 발발되었는가를 6. 25 전쟁 60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하고 그 후 발굴된 자료들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1) 최용호, “미니전사, ① 전쟁발발,” 『조선일보』, 2010. 3. 8, p. A5.
2)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서울: 나남, 2008), p. 871.
3) 김학준, 『한국전쟁-원인·과정·휴전·영향』(서울: 박영사, 2003), 제3 개정·증보판, p. 414.
4) Khrushchev Remembers, with an Introduction, Commentary and Notes by Edward Crankshaw, translated and edited by Strobe Talbott (Boston: Little, Brown and Co., 1970).
5) 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 제하 첫 번째 자료는 미국과 전쟁 중인 베트콩에 대한 소련의 지원문제를 중국, 월맹 측 관계관들과 협의하려는 소련 관계관들에게 배경정보로 제공 할 목적으로 1966년 소련 외무성이 한국전쟁에의 소련과 중국의 개입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 Translation and Commentary,”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Issue 3 (Fall 1993),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 C. pp. 1,14-18. 두 번째 자료는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정리한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이하 『한국전 문서요약』로 약칭)로서 1949-53년 기간 중 한국전쟁에 관한 216건, 총 548쪽에 이른다. 세 번째 자료의 정식 명칭은 The Archive of the President, Russian Federation 이며 호칭은 APRF로서 1950. 2- 1953. 7 기간 중의 총 1, 200쪽에 이르는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 소장 문서들이다. 상기 문서들은 1993년 가을부터 Washington, D. C. 소재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간하는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이하 CWIHP로 약칭) Bulletin에 시리즈로 게재 되었으며 http://www.wilsoncenter.org/cwihp 의 The Korean War 섹션에서 검색할 수 있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1):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지난 3월 26일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의 천안함 폭침 원인을 조사해 온 민군합동 조사단은 5월 20일 조사결과 발표에서 침몰 해역에서 수거한 어뢰의 프로펠러와 추진축 등 부품이 북한산 CHT-02D 어뢰의 설계도면과 일치함을 밝혔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측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스모킹 건: smoking gun)’들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날조극’이며 남북한 관계를 파탄시키려는 모략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물증을 확인하기 위한 검열단을 남한 현지에 파견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북한이 60년 전 대남 평화공세를 취하다가 6월 25일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뚫고 남침을 하고서도 지금까지 북침을 하였다고 선전을 하고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 그간 자행해온 각종 도발과 테러를 부인해 온 것보다 더 질이 나쁘고 뻔뻔하다. 마치 살인을 부인하던 범인이 현장 검증까지 스스로 하겠다는 식으로 막가는 태도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입성하기까지 단 3일이 걸렸다. 북한군은 당일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26일 의정부, 27일 창동,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김포· 문산· 포천·의정부·춘천·가평 등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력에서 남북한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상군 병력은 국군의 2배였다.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18만2000명이었다. 국군은 8개 보병사단과 2개 독립연대 등 9만4000명이었다. 북한 전투장비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개전 당시 북한은 200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했다. 국군은 단 한대도 없었다. 장병들은 북한 전차 소리만 들어도 도망을 가거나 두려움에 떨었다. 공군력의 경우 북한은 전투기 포함 211대가 있었지만,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북한 주공(主攻)은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았다.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는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제1사단과 1개 전차연대는 문산-서울 방향으로 공격했다. 나머지 6사단은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로 진격하게 했다.
조공(助攻)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맡았다. 이 중 제2, 12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는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 동측을 우회 공격, 국군 주력을 포위하도록 했다. 나머지 제5사단은 제766유격연대와 제945육전대의 지원을 받아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국군의 전방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을 배치했다. 그나마 북한 남침 전날인 24일 0시를 기해 한동안 계속했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됨에 따라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1)
위와 같은 전쟁 초기의 전황과 이를 맞이한 한국 측의 대응, 특히 많은 장병의 휴가와 외박에 비추어 6·25 전쟁이 어느 측의 공격에서 시작되었음이 자명한데도 한국 국내에서는 북한의 북침 주장이 위험할 정도로 퍼져 있다.
이와 같은 북침 주장과 관련하여 지난 10년간 좌파정부 집권동안 주적 개념에 대하여도 김충배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2004년 1월 육사 가(假)입교생 의식조사”를 한 결과 당시 250여명의 가입교생 중 무려 34%가 주적(主敵)이 ‘미국’이라고 답했고, ‘북한’이라고 답한 입교생이 33%에 머물 정도였다고 증언한 것처럼 크게 오도된 바 있다.
이렇게 학생들의 주적 개념이 오도되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2008년 6월 23일 행정안전부가 “리서치&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중·고생 1,0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보·안전의식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를 묻는 질문에 미국(28.4%)이 가장 높았으며, 다음이 일본(27.7%)이고, 북한은 24.5%로 3위에 그쳐 충격을 주고 있다.
북한은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남북한 군인, 유엔군과 중공군의 군인이 300만 명에 달하고 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야만적인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키고도 북침 주장을 계속하고 있고 한국 내부에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북침 주장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을 구상하고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위장전술임이 북한 자료 분석을 통하여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2)
특히 1992년부터 러시아가 더 이상의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결정적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전후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Stalin)-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 간에 오고 간 비밀전문들을 공개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론자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워졌고(3) 남침, 북침에 대한 논쟁도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남아 있는 문제는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의 회고록(4),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과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역임한 이상조의 1989년 9월 11일 기자회견 등에서 강조된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전쟁”인가를 검증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는가를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5)로 검증해보고 휴전 57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얻을 교훈과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계속)
<필자 주>
* 발표문은 『국제정치논총』 제39집 2호(1999)에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관한 연구” 제하로 개재된 연구자의 논문 중 누구에 의하여 남침 전쟁이 발발되었는가를 6. 25 전쟁 60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하고 그 후 발굴된 자료들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1) 최용호, “미니전사, ① 전쟁발발,” 『조선일보』, 2010. 3. 8, p. A5.
2)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서울: 나남, 2008), p. 871.
3) 김학준, 『한국전쟁-원인·과정·휴전·영향』(서울: 박영사, 2003), 제3 개정·증보판, p. 414.
4) Khrushchev Remembers, with an Introduction, Commentary and Notes by Edward Crankshaw, translated and edited by Strobe Talbott (Boston: Little, Brown and Co., 1970).
5) 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 제하 첫 번째 자료는 미국과 전쟁 중인 베트콩에 대한 소련의 지원문제를 중국, 월맹 측 관계관들과 협의하려는 소련 관계관들에게 배경정보로 제공 할 목적으로 1966년 소련 외무성이 한국전쟁에의 소련과 중국의 개입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 Translation and Commentary,”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Issue 3 (Fall 1993),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 C. pp. 1,14-18. 두 번째 자료는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정리한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이하 『한국전 문서요약』로 약칭)로서 1949-53년 기간 중 한국전쟁에 관한 216건, 총 548쪽에 이른다. 세 번째 자료의 정식 명칭은 The Archive of the President, Russian Federation 이며 호칭은 APRF로서 1950. 2- 1953. 7 기간 중의 총 1, 200쪽에 이르는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 소장 문서들이다. 상기 문서들은 1993년 가을부터 Washington, D. C. 소재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간하는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이하 CWIHP로 약칭) Bulletin에 시리즈로 게재 되었으며 http://www.wilsoncenter.org/cwihp 의 The Korean War 섹션에서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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