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경화와 국가정보전략
최근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일본 자위대의 무장강화와 자의적인 해외파견, 안보리 진출 시도, 독도 침탈 시도, 중국과의 남사군도 분쟁, 러시아와 사할린 분쟁 등 일본의 거침없는 행보가 2차 대전 발발 전과 너무 비슷하다. 일본의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침략과 수탈 뒤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막강한 정보력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설자리가 없던 무사, 즉 사무라이들을 훈련 시켜, 낭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 동남아 등지로 보냈다.
조선 침탈도 일순간의 군사적 침략과 국내 친일파들의 협조로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1874년 부터 정보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일합방이 1910년 이니, 약 36년간 정보활동을 하여, 조선을 36년간 지배한 것이다. 일본 군부는 1882년 일본에 온 수신사 김옥균 일행을 통해서,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였으며, 1884년 김옥균 등을 앞세워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너무 급진적이고 일본의 지원만을 너무 믿은 이 정변은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의 군부는 호시 탐탐 조선의 침략 구실을 찾기 시작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다시 진주한 일본군들은 동학혁명의 진압과정에서 스파이들을 활용하여 청국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게 된다. 사실 청나라는 자체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청국의 내정이 복잡하고 군대가 낙후되어 조선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후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 정권을 수립하고, 단계적인 조선 강제병합 절차를 진행하게 된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세력에 도전장을 받게 되자, 제정 러시아 공산주의자에 대한 지원을 단행하여 힘을 약화시킨 후,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승리로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고, 영국 등 제강들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조선을 침탈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30년 이상의 기간동안 조선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여 활용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만주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진격할 때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우익과 군부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대로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 다음으로 강력하며, 최첨단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 총리가 주변국들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우익집단들은 연일 영토문제 등에 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내각조사실에서 해오던 국내정보 및 해외정보 수집을 별도의 정보기관을 설립하여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진행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중앙정보국 , CIA와 같은 기구를 설립하고, 인원도 늘려서 막강한 정보력을 갖추겠다는 심산이다.
일본의 경제력과 상당한 해외원조에도 불구하고, 외교 교섭력이 떨어지고,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과거 일본은 민간회사인 만철에 조사부를 설립하여 정보력을 비밀리에 취합하여 정부에 제공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한걸음 나가서 공식적인 정보기구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은 국가 이익을 위해서 활동을 한다. 일본의 정계와 경제계가 보수 우익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당연히 일본의 정보력 강화는 대외 강경정책과 우경화 체계를 굳건하게 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우경화가 어디까지 갈건인지 모르겠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로 군사대국화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고 첨단무기로 재무장하고 있다.
국가정보기관 하나 설립이 이렇게 까지 영향이 있을 것인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일본 군부와 우익집단의 행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려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군사력 유지는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의 정신력이 강하고 훈련이 잘되어 있다고 하여도 첨단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의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이 군사무장과 대외 팽창에 활용되어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까지 발전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한국의 정치인들이 아는 지 모르겠다.
조선 침탈도 일순간의 군사적 침략과 국내 친일파들의 협조로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1874년 부터 정보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일합방이 1910년 이니, 약 36년간 정보활동을 하여, 조선을 36년간 지배한 것이다. 일본 군부는 1882년 일본에 온 수신사 김옥균 일행을 통해서,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였으며, 1884년 김옥균 등을 앞세워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너무 급진적이고 일본의 지원만을 너무 믿은 이 정변은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의 군부는 호시 탐탐 조선의 침략 구실을 찾기 시작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다시 진주한 일본군들은 동학혁명의 진압과정에서 스파이들을 활용하여 청국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게 된다. 사실 청나라는 자체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청국의 내정이 복잡하고 군대가 낙후되어 조선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후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 정권을 수립하고, 단계적인 조선 강제병합 절차를 진행하게 된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세력에 도전장을 받게 되자, 제정 러시아 공산주의자에 대한 지원을 단행하여 힘을 약화시킨 후,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승리로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고, 영국 등 제강들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조선을 침탈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30년 이상의 기간동안 조선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여 활용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만주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진격할 때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우익과 군부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대로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 다음으로 강력하며, 최첨단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 총리가 주변국들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우익집단들은 연일 영토문제 등에 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내각조사실에서 해오던 국내정보 및 해외정보 수집을 별도의 정보기관을 설립하여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진행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중앙정보국 , CIA와 같은 기구를 설립하고, 인원도 늘려서 막강한 정보력을 갖추겠다는 심산이다.
일본의 경제력과 상당한 해외원조에도 불구하고, 외교 교섭력이 떨어지고,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과거 일본은 민간회사인 만철에 조사부를 설립하여 정보력을 비밀리에 취합하여 정부에 제공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한걸음 나가서 공식적인 정보기구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은 국가 이익을 위해서 활동을 한다. 일본의 정계와 경제계가 보수 우익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당연히 일본의 정보력 강화는 대외 강경정책과 우경화 체계를 굳건하게 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우경화가 어디까지 갈건인지 모르겠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로 군사대국화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고 첨단무기로 재무장하고 있다.
국가정보기관 하나 설립이 이렇게 까지 영향이 있을 것인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일본 군부와 우익집단의 행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려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군사력 유지는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의 정신력이 강하고 훈련이 잘되어 있다고 하여도 첨단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의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이 군사무장과 대외 팽창에 활용되어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까지 발전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한국의 정치인들이 아는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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