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안내] 터 - 우리가 몰랐던 신비한 땅 이야기 - 민홍규 저
국가정보전략연구소
2014-10-08 오후 4:36:00

터- 우리가 몰랐던 신비한 땅 이야기

“숭례문 화재…잇단 대형 참사와 무관할까”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다진 정도전은 1398년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숭례문을 건립했다. 숭례문에는 불의 조화를 뜻하는 대풍수의 비기(秘記)가 숨어 있다. 숭례문이 불타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괘에 따라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세로 현판’을 달았다.



1592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보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금은 피란 가고 국토와 백성은 참혹하게 유린됐다. 1910년에는 숭례문 현판이 떨어졌다. 그 해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며 나라가 망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분단과 전쟁을 겪었다.



2008년 2월 숭례문이 방화로 불에 탔다. 2010년 11월에는 국민화합과 국운융성, 통일의 비원(悲願)이 담긴 대한민국 4대 국새가 폐기 처분됐다. 그 후 천안함 침몰(2010.3.26), 태안 고교생 해병대 캠프 사고(2013.7.18), 경주 리조트 강당 붕괴(2014.2.17), 세월호 침몰(2014.4.16) 등 대형 참사가 잇따르고 있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대거 희생됐다. 숭례문 화재와 국새 폐기는 경남 산청 국새전각전과 과연 무슨 연관이 있을까.



경남 산청의 ‘기(氣)체험장’은 누가 왜 만들었는가!

터에도 눈이 있다. 국새전각전에서 만든 대한민국 4대 국새가 폐기되고 혈처를 다스리는 거울바위 석경(石鏡), 거북바위 귀감석(龜鑑石), 솥바위 복석정(福石鼎) 중 세 번째 바위가 잘못 놓여진 이후부터 터의 울음이 계속 되고 있는 듯하다.



터의 울음이 예사롭지 않다. 3년을 교도소에서 영어의 몸으로 지내면서 4대 국새를 만든 세불 민홍규는 많이 생각했다. 언젠가 이 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해왔지만 때가 온 것이라 마음먹었다. 더 이상 이 터가 누군가의 사욕으로 훼손되고 이용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과 터 스스로 앓고 있는 몸살을 모른 체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범부로서 이 터를 만나고, 터가 가진 기운을 일깨워 하나하나 모양새를 찾아가던 여정이다. 완벽한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던 비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말하는 것도 이 터가 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끊이지 않는 화를 다스리는 데는 바위가 최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바위로 땅의 혈처를 다스리는 것이다.



한반도를 거대한 몸으로 가정하면, 온기의 불기운이 가장 큰 혈처는 백두대간 단전자리이다. 전국 산천을 떠돌다 찾은 적임지는 경남 산청군 금속면 특골이다. 오행으로 토생금(土生金)을 부르는 터로 이 땅의 고단함을 처방하는 대길지(大吉地)다.



먼저 이곳의 땅 기운이 금(金) 기운의 국새를 만들도록 했다. 이곳에 국새전각전을 지어 대한민국 4대 국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기(氣)가 가장 많이 뿜어져 나오는 혈처(穴處) 세 곳을 잡았다.



국새 제작뿐 아니라 세 개의 바위가 침을 놓듯이 혈 자리에 바로 자리 잡게 될 때는 국운도 만개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터라고 생각했다.

맥이 막히면 사관(四關)을 따내 듯 터의 혈에 세 개의 바위를 놓으면 이 땅의 숨통을 틔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숭례문이 불탄 지 한 달 후인 2008년 3월 첫걸음을 내디뎠다.

첫 번째 바위는 석경(石鏡)이다. 옛날에 쓰던 동거울(銅鏡)이 떠올랐다. 하늘을 압축하는 이것은 우리 마음과 세상을 비추는 도구였다. 이것을 통해 세 개 바위의 시작점에는 바위가 거울이 되어 적연좌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거울바위인 셈이다.

두 번째 바위 귀감석(龜鑑石)은 거북을 옥새에 사용한다는 역사를 참고하였다. 조선시대에 수 없이 많이 쓰이던 거북이옥새처럼 거북 바위를 놓고자 했다. 간절함 때문인지 앞으로 구해낼 거북바위의 형태, 크기, 모양까지도 떠올랐다. 생각한 것을 작업 노트에 그대로 그려 놓았다.

세 번째 바위는 힘들고 고단한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위해 다 퍼먹어도 남을 정도의 커다란 복석정(福石鼎)이다. 복을 나누어 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솥바위다.

석경, 귀감석, 복석정이 나란히 앞산을 향해 놓일 자리가 정해져 있다. 석경을 따라가면 귀감석과 닿아 있고, 멀리 시야를 넓혀 앞으로 가면 복석정이 놓여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앞산과 갈지(之)자 형의 선상에 놓인다. 혈처에 올리는 바위는 음택을 없애고 양택, 양기 자리로 상관관계가 크다.

세 개의 바위는 각각 성격이 있다. 석경은 하늘의 뜻을 담아내는 강기석(降氣石), 귀감석은 땅의 지력을 돋우는 응기석(應氣石), 복석정은 사람을 위해 풀어내는 정기석(精氣石)이다.

복석정은 터 안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다. 기운의 위력이 커서 그러하다. 반드시 기운을 움직이는 터가 되도록 기혈의 움직임을 보위하는 건물을 세워야 한다. 이 터에서는 바위가 주인이기에 그렇다.

국새 제작 터로 잡힌 이곳은 우리나라 금석학(전각예술)의 운용지로 손색이 없다. 이 터는 주산 좌우로 두 개의 산이 있다. 주산은 왕을 뜻하는 왕산(王山)이다. 우측은 필봉산(筆峰山), 좌측은 망경산(望京山)이다. 왕이 문무백관을 좌우로 거느린 형국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다. 이 터의 세 혈처와 국새전각전, 등황전 등 비보(裨補) 건물은 서로 상응하도록 지어졌다. 국새 제작 외에 분정항례(分庭伉禮) 등 이 터 안에서 벌어질 여러 일들을 예상하여 정하였다. 전각전은 기 운행의 최종 건물이라 매우 중요하다.

마침내 국새를 제작할 터가 잡히고 국새전각전도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국운 융성을 기원하는 국새를 제작할 세 혈처도 찾아냈으니 틀은 잡힌 것이다. 이 터가 정말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영원한 쉼터가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지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서남쪽 끝에는 천년 고찰인 구례 화엄사가 있다. 이곳은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각황전(覺皇殿)이 있다. 이곳과 반대편 동북쪽 끝이 바로 이 터이다. 이 자리는 화엄사 각황전과 서로 힘을 대등하게 조율하는 ‘큰오름(등황)’의 운장이 있다. 서로 좋게 한다는 힘이다. 그래서 등자(鐙子·말등자)요, 평성을 잡아주는 건물의 이름이 등황전(騰皇殿)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지리산 전체 힘을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잡아놓는 이치가 있다. ‘등황’이 필요한 터라서 이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터는 트라이앵글의 힘이 강하다. 각각 세 혈처를 동시에 울리게 하지 않아도 서로 맥이 공존하고 있어서다. 때로는 공명과 파장, 진동이 성격은 다르지만 혈류 같은 맥이 울리고 있다. 또 터가 강한 곳은 대개가 바람이 드세다. 일도 많고 부딪힘도 다수 있다고 한다. 이 터에서는 세 개의 바위가 제 혈처에 놓이고 기운을 잡는 비보 건물과 여타 시설물이 제자리가 잡혀야 완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터는 아직 미완성이다.

복석정은 석경이나 귀감석보다 혈처가 강한 곳에 놓인다. 비보 건물까지 완공하고 나면 화룡점정으로 놓으려고 일부러 허좌(虛座)에 임시로 놓았다. 제 혈처에 놓지 않고 함부로 옮기면 기맥이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홍규가 모함을 받고 영어의 몸이 되자 산청군은 산청세계한의약엑스포 개최를 이유로 복석정을 엉뚱한 곳에 안치했다. 등황전은 오색 칠을 해 마치 사찰 같이 만들어 놨다.

민홍규가 국새를 산청, 굳이 이 터에서 완성하려 했던 이유는 4대 국새에 담은 의미를 실현시켜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땅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4대 국새는 국운융성과 국민화합의 뜻을 담았다. 그래서 그 이름이 ‘태평새’였다. 그 뜻을 실현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큰 기운이 필요했다.

∣지은이_ 민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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