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해져 가는 세월 속에서도 시인이 되고자 하는 친구
국가정보전략연구소
2011-04-18 오후 3:53:00
현재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인생 말년에 유럽여행을 해보고, 소설 책 한 권 쓰는 것이 소원인 친구가 있다. 어릴 적 감수성이 예민한 이 친구는 또래보다 조숙하여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나의 상상을 뒤로 한 채 지방의 어느 기업 회계담당 직원으로 살고 있다. 가끔씩 시처럼 아름다운 글을 보내주어 이 친구가 ‘아직 꿈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어제 친구에게 받은 글을 보면서 삭막한 생활 속에서 고향을 다시 떠올려 본다.

연말연시, 이 맘 때가 되면

산골소년이었던 제 유년시절이 떠오릅니다.

제 고향에서 읍내장터로 나가는 길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남쪽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읍내장터에 가시려면

새벽에 일어나 한참을 버스를 기다려야 하지요.

어머니가 읍내장터에 가시는 날에는

언제나 꼬옥 제 선물을 사 오십니다.

그때마다 더 좋은 아들 선물 고르다

어머니는 버스를 놓치곤 했지요

이른 새벽 내뿜는 하얀 입김이 희망처럼 보입니다.

새벽어둠을 뒤로하고 이윽고 어머니가 버스를 탑니다.

그 버스가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산 고개를 뉘엿뉘엿

넘어가다 이윽고 제 시선에서 사라져 버리면

전, 점심 식사도 잊고 온 종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어느새 오후가 되고, 어머니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저는 먼 산 고개를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습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트럭들이 얄밉고 싫었습니다.

그 간절한 기다림에 지쳐본 사람은 압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며, 또 얼마나 힘겨운지를......

예정시간 무렵, 버스 한 대가 산 고개를 넘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마을 쪽으로 힘겹게 달려옵니다.

이제 어머니가 오시려나, 오늘은 무슨 선물을 사 오시려나

부푼 기대감과 설레임에 긴 기다림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을어귀에 버스가 도착하고

다시 북쪽의 산 고개를 향해 출발하도록

어머니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또 버스를 놓쳤나 봅니다.

1시간에 한 대 꼴인 버스를 놓치고

아마 어머니는 읍내 버스정류장에서

또 하염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철없는 아들의 기다림도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기다림도 불편하거나 고단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향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날 늦은 오후 햇살이 산 고개를 타고 오르고

눈부신 저녁 석양이 낮게 깔린 하늘에 그려지면

흙먼지 바람에 추위도 잊고 버스를 기다리던

아들의 눈에 산타 같은 버스가 고개를 넘어 옵니다.

어머니도 멀리서 차창으로 정류장에서 서성이는 아들을 찾습니다.

버스가 산을 두어 바퀴 휘돌아 내려오는 동안

아들은 하루 종일 굶주린 기다림에 드디어 허기를 느끼지만

버스에서 내리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손에 들린 선물을 보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강아지처럼 날뜁니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는 것이

이처럼 부푼 희망과 간절한 기다림 속에

정류장에서 교차되는 순간이었으면 합니다.

온 종일의 기다림 끝에 버스가 산 고개를 넘어오듯

시간이란게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기다려 주고

다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절약해서 쓸 수 있지만

이 시간만은 절약해 쓸 수 없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읍내에서 버스를 놓치고

1시간을 다시 기다려야 하듯이 때를 놓치고 말면

속절없이 기다려야 하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이처럼, 나이 들어가는 즐거움이란

추억을 복습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새해에는 더 아름다운 추억을 장만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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