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논술 논제 분석] ⑤18세기 이후의 우리나라 대내외적인 정책에 관해 논하라
민진규 대기자
2023-07-02 오후 3:34:05
중국인은 1만년의 역사와 동양문명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강하지만 한국민들도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민족답게 5,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스러워한다. 10세기초 고려의 건국 이후 한민족의 주요 활동무대가 한반도로 협소해지면서 하늘을 찌르던 기상이 꺾였고, 조선도 중국대륙으로 군사적 진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속담처럼 쪼그라들던 조선의 국력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엄청난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18세기 이후 실학사상의 태동으로 사회변혁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내부 정치파벌의 치열한 갈등과 국제정치 세력의 음흉한 모략을 파악하지 못해 조선은 멸망했다. 18세기 이후 200년간은 파벌싸움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되면 국가가 자연스럽게 망해간다는 사례를 보여준 교과서였다. ‘18세기 이후 우리나라 대내외적인 정책에 관해 논하라’는 논제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내정혼란과 외교력 부재로 자주독립과 개혁은 물거품이 돼

조선은 500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당파싸움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도 낙후된 정치시스템을 개혁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고려는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고 호족들이 권력을 세습하면서 정치체제를 붕괴됐다. 고려 말 무신의 난과 신진사대부의 출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고려의 국정 난맥상을 잘 파악했던 조선의 신진사대부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해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사림은 훈구파를 축출한 이후 파당을 조직하고 불필요한 정치논쟁을 일삼았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대내외적인 정책을 3가지로 구분하면 국내, 대(對)아시아, 기타 국가 등으로 나눠진다.

첫째, 국내정책은 국내의 당파싸움,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 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당파싸움은 영∙정조의 탕평책이 나름 효과를 발휘했지만 순조로 넘어가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좌초됐다. 중앙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양반과 중인들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실학을 연구했지만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고종의 즉위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왕권을 일시적으로 회복했지만 외세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왕권강화와 서양세력의 배척에 힘을 쏟았지만 정작 본인은 개혁개방을 반대하는 수구파로 몰렸다. 개화파는 명성황후의 후원을 받아 개혁을 서둘렀고, 일본의 세력을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3일 천하로 끝났다.

둘째, 대아시아 정책으로 청과 일본과 현안 이슈(current issue) 조정과 협상을 통해 독립국가의 지위를 보장받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의 정치 및 군사적 영향력에 지배당했지만 18세기 이후 자주적인 관계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극동아시아의 변방에 위치한 조선은 청을 통해서만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내정간섭과 전근대적인 조공관계 등은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개방정책을 강화해 국력을 신장해 조선을 위협했고, 조선은 일본에 강온양면 전략을 구사했지만 실패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 내부에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됐고 침략은 시기의 문제일 뿐이지 기정사실화됐다. 조선은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청과 주변 열강의 힘을 빌어 저항했지만 일본의 침략야욕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셋째, 기타 국가인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외교교섭을 통해 청과 일본의 간섭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지만 이들 국가의 이해충돌로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야욕을 억제하는데 기여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독일도 아시아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호시탐탐(虎視眈眈) 기회를 노렸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일본의 무력증강에 힘을 보탰다. 인도, 아프리카, 중동 등에서 식민지관리도 힘에 부쳐 영일동맹을 맺어 동아시아에서 이권분할에 만족했다. 미국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았지만 영국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조선에서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하와이, 필리핀 등에서 이권을 확보하는 것으로도 식민지 쟁탈전쟁의 전리품을 충분하게 얻었기 때문이다.

 

◈ 국가정보기관은 21세기 국가위기를 극복하는 숨은 조력자가 돼야

 

▲ 논제 분석과 개요문 샘플 [출처=iNIS]


18세기 이후 조선이 망한 시기까지는 안타까운 비운의 역사이지만 국력이 허약하고 지도층이 무능한 국가가 망해가는 과정으로 배울 가치는 충분하다. 국정원 수험생이 18세기 이후 우리나라 대내외적인 정책의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실과 지도층이 무능하면 민중이라도 깨어있어야 하는데 조선의 백성들도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은 부족해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저항했던 동학혁명도 무능한 왕실과 부패한 집권층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동학군은 일본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밑으로부터의 민중혁명의 호기를 맞았지만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던 농민군이 신식군대에 이길 수는 없었다.

작금의 한국도 대의민주정치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국회와 개혁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인해 국력이 낭비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몇 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 불이 붙었던 촛불은 적폐세력의 발호로 다시 점화됐다. 미∙중의 무역분쟁과 주변국의 군사무장 및 도발은 한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중이다. 국민들이 정치권과 정부를 대신해 타개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다시 국가위기(national crisis)를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약소국의 운명은 국내보다는 주변국의 정치환경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냉정한 국제정세 분석과 대비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18세기와 19세기 조선의 왕실과 양반이 정신을 차리고 개혁개방을 잘 추진했다고 해도 주변 열강의 침략은 피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아니더라도 한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확보하려던 강대국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변 4강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은 21세기 한국의 미래도 좌지우지(左之右之)할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잘 알고 있지만 다양한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일본의 국민 대다수가 군대 보유나 침략전쟁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수정하려는 우익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지만 여론은 변할 수 있어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자주국방과 자력갱생이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외세에 의존하려는 허약한 정신자세는 하루빨리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국제정세와 사익(私益)에 따라 친청(淸), 친일(日), 친미(美), 친러(露), 친영(英) 등 정책을 지지했다. 청과 일본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방문한 지식으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조선이 자주적인 역량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할 여력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변명에 불과하다. 자주국방과 자력갱생은 구호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국민이 국민총화를 바탕으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돼 경제력을 강화시키는데 매진할 때 국력은 신장된다. 현대사회에서 국력은 경제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1970~90년도 산업화의 숨은 공신이었던 국가정보기관도 다시 분발(奮發)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와 같은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 남기지 않도록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과 사익추구에 골몰하는 자칭 ‘국가지도층’을 믿고 기다리면 국가의 운명을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국민이 깨어있었던 국가가 망한 사례는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가정보기관의 직원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글로벌 환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위기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특정 정파에 휘둘리지 않도록 애국심과 사명감에 투철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이라는 무거운 짊이 가슴을 억누르고 어깨를 짓이기더라도 결코 벗어 던져서는 안 된다. 외롭고 힘든 길이라도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이름 석자는 찬란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고, 후손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대대손손(代代孫孫)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한다. 

- 계속 – 

* 내용 문의 : 민진규 교수(stmin@hotmail.com)
저작권자 © Institute for National Intelligence Strateg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NIS 분류 내의 이전기사